상교우서(소식지)

Suwon Research Institute of Catholic Church History

월간(2021~)

[121] 2025년 6월호
관리자 2025-06-01 16:53:17
첨부파일 상교우서_121_2025년 6월.pdf
관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십이단’(十二端, 주요 기도) 관련 내용 소개 (2)
- 신자들의 심문 진술에 나오는 ‘십이단’ 내용 -

『천주성교십이단』(줄여서 ‘십이단’이라고 함)은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여 국가에 의해 금압(禁壓, 금지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신자들이 어려서부터 반드시 익혀야 하고, 비신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현재에 사용되는 『가톨릭 기도서』 제1편과 『한국 천주교 예비 신자 교리서』 부록에 실린 ‘주요 기도’는 ‘십이단’ 기도문이 수정·추가된 것입니다.
필자는 ‘십이단(주요 기도)의 변천 과정과 간행본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지난 3월 8일(토) 부산교회사연구소에서 그동안 정리했던 ‘십이단’에 대한 서지학적 기초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 주제에 대한 자료를 더 수집하고 비교·분석해서 연구논문으로 발전시킬 예정입니다.
‘십이단’이 언급된 기록은 교회 측 자료[신자들의 증언록, 선교사제의 서한]와 관변 측 자료[포도청등록]에서 확인되는데, 이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가족, 회장 등에게 ‘십이단’을 배워 세례를 받았으며, 천주교를 전파할 때 교리(문답)와 ‘십이단’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신자들이 관아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십이단’ 등 기도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십이단’과 관련된 신자들의 기록을 일일이 연구논문에서는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상교우서 지면을 통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호에는 지난 호에 이어 관변 측 사료[『좌포청등록』(奎 15145-v.1-18)·『우포청등록』(奎 15144-v.1-30)]에 기록된 신자들의 심문 진술에서 확인되는 ‘십이단’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좌·우포청등록 기록 중 1868년부터 1879년까지 34명의 신자들이 심문 과정에서 ‘십이단’을 배웠다고 진술했습니다.

1868년과 1870년 신자들의 진술 - 죽을 위험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십이단을 배우다

무진(戊辰, 1868년) 6월 22일[양력 8월 10일] 좌포도청 진술에서 황명중(黃命仲) 요한[55세, 1814년생]과 하아기[河阿只] 데레사[44세, 1825년생] 부부[1845년경 혼인]는 자신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입교했는지를진술했습니다.[『左捕廳謄錄』 14권, 115a~115b면]
황명중은 서울 서빙고(西氷庫)[현재 용산구 서빙고동] 태생으로 계해년(癸亥年, 1863년) 당시 우연히 병에 걸려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같은 마을에 살면서 친했던 노인 여성[老婆]이 ‘병세가 정말로 위급하다면 성교(聖敎, 천주교)에서 그를 위해 이마를 씻는[洗額] 예식을 해줄 수 있는데 비록 죽는다 해도 그 뒤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위험[임종] 대세’를 권유한 것인데, 황명중 부부는 이 여성의 권유에 따라 정의배(丁儀培)를 초빙했고 먼저 남편인 황명중이 천주교를 배우고 대세를 받았습니다. 황명중의 병세가 차츰 나아지자 아내인 하아기도 정의배의 권유에 따라 천주교를 배우고,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황명중·하아기 부부는 서로 주모경·십이단을 외우면서 익혔습니다.[夫婦間間誦習 主母經十二端矣] 병인(丙寅, 1866년) 천주교 박해 이후 부부는 겁이 나서 천주교를 저버렸으며, 심문 과정에서 배교한다고 진술했습니다.
『병인치명사적』 21권 134쪽과 『치명일기』 250~251번에 나오는 황명헌 부부가 황명중·하아기 부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측 기록에는 황명헌 부부가 포도청에서 옥중 치명(致命)한 것으로 나옵니다.
경오(庚午, 1870년) 2월 27일[양력 3월 28일] 좌포도청 진술에서 김석조(金石祚) 요한[65세, 1806년생]은 자신의 천주교 입교 사정을 진술했습니다.[『左捕廳謄錄』 16권, 9b면]
그는 강원도 양구(楊口) 후동면(後洞面)[현재 양구군 해안면 지역] 태생인데, 25년 전인 1845년경에 광주(廣州)에 사는 이치영(李致英)이라는 사람이 김석조가 사는 동네로 와서 의원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김석조의 아내가 중병이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치영이 간병하러 와서 김석조에게 천주교 입교를 권유했습니다. 이후 김석조는 십이단을 비롯한 천주교 서적을 배우기 시작했고[邪書始爲受學十二端] 2년간 열심히 공부한 후 서양인 페롱 권(權)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2번에 걸쳐 프티니콜라 박(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석조는 자신이 무식하여 천주교 공부를 그만두었고 지금까지 20여 년이 되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김석조는 1847년경 페롱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페롱 신부는 1857년에야 입국했기 때문에 세례받은 연도가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세례를 준 신부를 잘못 기억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명중·하아기 부부와 김석조 진술을 통해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주변 신자들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평소에 잘 알던 이웃이기도 했고, 또는 의업을 매개로 환자들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의원]이기도 했습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 대한 대세는 그 당사자 한 명뿐 아니라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들을 천주교로 이끄는 효과적인 전교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한 신입 신자들은 십이단을 비롯한 주요 기도문과 교리문답서를 배워 선교사제들에게 세례·견진 등의 성사를 받았습니다.

1868년 좌포도청 심문에서 죽은 황해도 순영나장 이항래 - 송도 윤병기에게 십이단을 배우다

무진(戊辰, 1868년) 9월 19일[양력 11월 3일] 좌포도청에서 진술[『左捕廳謄錄』 14권, 130a~130b면]한 이항래(李恒來) 굴왕보(屈往甫, 골룸바노(?))[34세, 1835년생]는 일반 신자들과 좀 달랐습니다.
이항래는 원래 황해도 장련(長連) 태생인데 어렸을 때 해주(海州) 성내(城內)로 이주했고 체포 당시 순영나장(巡營羅將)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나장은 죄인을 문초할 때에 매질하는 일과 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은 하급관리로, 중앙에서는 의금부에, 지방에서는 진영(鎭營, 군사·경찰 업무를 맡은 군영)에 속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순영나장은 황해도 해주 감영에 속한 진영[巡營]의 나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로 포도청에 잡혀 온 이항래가 바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역할을 맡은 나장이었던 것입니다. 1860년대에 들어 그전까지 신자들이 없었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이항래 같은 하급관리, 특히 천주교 신자를 잡아야 하는 나장까지 입교할 정도로 천주교 전파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래는 임술년(壬戌年, 1862)에 송도(松都, 개성)에 사는 윤병기(尹秉起)[1868년 당시는 이미 죽었음]의 권유로 십이단을 배웠고[因松都已死尹秉起之慫惥 所謂十二端受學] 윤병기의 집으로 가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관리 신분이고 천주교를 공부할 틈도 없어서 계해년(1863) 무렵에 천주교를 영원히 배척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와 같이 이항래는 이미 배교했다고 주장했지만, 좌포도청에서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매를 치면서 심문하다가 물고(物故)되었습니다.
‘물고’는 원래 ‘의도하지 않은 사고사’라는 뜻이지만, 때로는 죽을 때까지 매를 치는 비공식적인 처형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항래의 죽음이 의도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포도청 관원들이 순영나장이자 신자였던 그가 배교했다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더욱 혹독하게 매를 치는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항래에게 전교한 윤병기는 개성 지역을 거점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신자로, 다른 포도청등록 기록과 교회 측 증언록에서 확인됩니다.[『左捕廳謄錄』 15권, 96a면, 기사(己巳, 1869년) 8월 15일(양력 9월 20일) 서중공(徐仲公) 아우구스티노[阿可宕][40세, 1830년생] 물고(物故) ; 『병인치명사적』 9권 26~27쪽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45] 개성에 살던 서중공은 35세 때[1864년] 윤병기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그해 그의 집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치명사적’에 의하면, 1868년 윤병기는 이달손과 함께 붙잡혀 개성 관아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이달손이 치명한 4월 2일(양력 4월 24일) 이전에 죽었습니다. ‘정리번호 145’에는 이름과 세례명이 ‘윤병기(尹秉冀) 베드로’로 나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1860년대 개성 신자들을 매개로 황해도 지역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었고, 신입 신자들이 십이단을 배우면서 입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72년 우포도청 심문에서 진술한 이경국과 원아기 부부 - 십이단을 배우고 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다

임신(壬申, 1872년) 3월 8일[양력 4월 15일] 우포도청 진술에서 이경국(李敬國) 바오로[70세, 1803년생]와 원아기[元阿只] 데레사[63세, 1810년생] 부부는 자신들이 어떻게 천주교를 입교했는지를 진술했습니다.[『右捕廳謄錄』 25권, 28b~29a면] 이경국은 30년 전[1842년경] 아현동에 사는 김성중(金成仲)에게 성호경·천주경·성모경·십이단, 영세문답·고해문답을 배웠고, 이 신부를 김성중 집에서 만나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10년 전[1862년경]에는 아현동에 사는 최인서(崔仁瑞) 집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에 와서 배교하기는 어렵고 오직 죽은 뒤에 ‘끝없는 즐거움’[無窮之樂]을 영원히 누리기를 바란다고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의 아내 원아기 역시 남편과 같이 김성중에게 천주경·성호경·성모경·십이단, 영세문답·고해문답을 배웠고, 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기에[勤工] 배교할 수 없고오로지 죽은 뒤에 좋은 곳으로 돌아가기를[歸善]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메스트르 신부는 1852년에 입국하여 1857년에 선종했습니다. 또한, 이경국이 말한 ‘30년 전’, 즉 1842년은 조선에 선교사제가 없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경국의 기억에서 기도문과 문답을 배운 연도가 잘못되었거나 이 신부에게 세례받은 연도가 몇년 후[조선 입국 이후]인데 이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경국·원아기 부부에게 천주교를 가르친 김성중은 다른 포도청 기록과 신자들의 증언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창문이 김성중을 따라가서 김대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진술[『右捕廳謄錄』 23권, 30b면, 무진(戊辰, 1868년) 1월 23일 나창문 베드로]을 보면, 적어도 1845~1846년 무렵에 김성중이 전교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경국·원아기 부부가 1840년대에 십이단 등 기도문과 교리문답서를 배우고, 1852년 입국한 메스트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석원 프란치스코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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