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십이단’(十二端, 주요 기도) 관련 내용 소개 (3) - 신자들의 심문 진술에 나오는 ‘십이단’ 내용 -
『천주성교십이단』(줄여서 ‘십이단’이라고 함)은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여 국가에 의해 금압(禁壓, 금지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신자들이 어려서부터 반드시 익혀야 하고, 비신자가 세례를 받기 전에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현재에 사용되는 『가톨릭 기도서』 제1편과 『한국 천주교 예비 신자 교리서』 부록에 실린 ‘주요 기도’는 ‘십이단’ 기도문이 수정·추가된 것입니다.
필자는 ‘십이단(주요 기도)의 변천 과정과 간행본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지난 3월 8일(토) 부산교회사연구소에서 그동안 정리했던 ‘십이단’에 대한 서지학적 기초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 주제에 대한 자료를 더 수집하고 비교·분석해서 연구논문으로 발전시킬 예정입니다.
‘십이단’이 언급된 기록은 교회 측 자료[신자들의 증언록, 선교사제의 서한]와 관변 측 자료[포도청등록]에서 확인되는데, 이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은 가족, 회장 등에게 ‘십이단’을 배워 세례를 받았으며, 천주교를 전파할 때 교리(문답)와 ‘십이단’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신자들이 관아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십이단’ 등 기도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십이단’과 관련된 신자들의 기록을 일일이 연구논문에서는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상교우서 지면을 통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호에는 지난 5·6월호에 이어 관변 측 사료[『우포청등록』(奎15144-v.1-30)]에 기록된 신자들의 심문 진술에서 확인되는 ‘십이단’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좌·우포청등록 기록 중 1868년부터 1879년까지 34명의 신자들이 심문 과정에서 ‘십이단’을 배웠다고 진술했습니다.
1872년 경기 지역에서 잡혀온 신자들의 진술 - 서울과 지방에서 십이단을 배우고 세례를 받다
임신(壬申, 1872년) 4월 26일[양력 6월 1일] 우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 지역인 여주(驪州)와 수원(水原)에서 잡혀온 사람들이었습니다.[『右捕廳謄錄』 25권, 29b~30a면] 그중 여주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서울에서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병인) 천주교 박해를 피해 여주 추읍동(鄒揖洞, 현재 양평군 개군면 주읍리. 1963년 여주에서 양평으로 편입됨)으로 피신했다가 1872년에 잡혀 서울로 끌려온 것이었습니다.
정한교(丁漢敎) 베네딕도[65세, 1808년생]는 아내 황아기[黃阿只] 마르타[65세]와 함께 잡혔는데, 그는 서울 장동(長洞)에 살던 40여 세 때[1847년경 이후]에 사촌매부 권대수(權大秀)와 이성(異姓) 5촌조카 홍봉주(洪鳳周)에게 십이단과 삼본문답을 배웠고 권대수 집에서 대세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권대수 집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보례와 고해성사를 받았습니다. 아내인 황아기는 서울 남문 밖에 사는 박 마르타에게 기도문을 배우고 권대수 집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황아기는 십이단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외웠다는 성호경·성모경[현재 성모송]·천주경[현재 주님의 기도]은 ‘십이단’에 포함된 기도문입니다. 그 역시 베르뇌 주교를 만났을 때 세례를 비롯한 성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정한교 부부와 함께 여주 추읍동에서 잡혀온 민유배(閔裕培) 아우구스티노[40세, 1833년생]는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30여 세 때[1862년경 이후] 서울 사는 이유일(李裕一)에게 십이단과 영세문답을 배우고 이유일 집에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한 점을 보면, 1862년 무렵에는 서울에 살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한교 등과 같이 심문을 받은 김성첨(金聖僉) 요셉[55세, 1818년생]과 김덕지(金德之) 안드레아[33세, 1840년생] 부자는 수원 산척동(山尺洞, 현재 화성시 산척동)에서 잡혀왔습니다. 김성첨은 본래 양지 은이[彦里, 현재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살다가 산척동으로 이주했고, 그 아들 김덕지와 함께 거기서 살았습니다. 김성첨은 20여 세[1838년경 이후]에 생질 임원식(林元植)에게 성호경, 천주경, 십이단을 배워 임원식에게 대세를 받았고, 나중에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보례를 받았습니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에 입국하여 186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목활동을 했고 1866년에 잡혀 순교했습니다. 따라서 김성첨은 1863년 이후에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보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김덕지는 20여세 때[1859년경 이후] 임원식에게 기도문을 배우고 대세를 받았고, 그의 집에서 오메트르 신부를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김성첨 부자에게 천주교를 전한 임원식이 어디에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김성첨에게 대세를 줄 때는 함께 은이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성첨 부자는 양지와 수원에 살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미리내[현재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를 중심으로 경기 남부 지역에서 활동한 오메트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습니다.
『병인치명사적』 21권 149~150쪽과 『치명일기』 320~321번에 나오는 정경승 베네딕도와 황 막달레나 부부가 위에 나오는 정한교 베네딕도·황아기 마르타 부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 측 기록에는 정한교 부부의 나이가 대략 50대이고, 증언자가 사촌여동생의 아들 권 바오로로 나옵니다. 정한교에게 천주교를 전한 사촌누이의 남편 권대수가 권 바오로의 부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서울과 지방에서 십이단 등을 배우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신자들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제들을 만나 성사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72년 우포도청에서 진술한 한씨 집안 신자들 - 입교 이후 대를 이어 신앙을 전하다
임신(壬申, 1872년) 11월 25일[양력 12월 25일] 우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신자들은 직산(稷山) 농촌(農村, 현재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와룡리)에서 잡혔는데, 모두 한 가족이었습니다.[『右捕廳謄錄』 25권, 31a~31b면] 이러한 사실은 교회 측 기록인 『병인치명사적』 6권 80~81쪽과 『치명일기』 195~200번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 보입니다.
한치원(韓致元) 알렉시오[63세, 1810년생]는 무술년(戊戌年, 1838년)에 이웃마을의 윤평심(尹平心)에게 성호경, 천주경, 십이단을 배웠고, 그에게서 대세를 받았습니다. 이후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한치원의 아들 한완쇠(韓完釗) 알달레[안드레아(?)][31세, 1842년생]는 10여 세 때[1851년경 이후] 부친에게 천주교를 배워 대세를 받았습니다. 이후 페롱 신부를 막내숙부[季叔] 집에서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의 아내 이어린년[李於仁連] 마리아[25세, 1848년생]는 13세 때[1860년경]에 이웃에 사는 홍가(洪哥)에게 천주경, 성호경, 십이단을 배웠고, 시삼촌 댁에서 오메트르 신부를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여기서 ‘시삼촌’은 남편 한완쇠가 언급한 ‘막내숙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완욱(韓完郁) 시몬[19세, 1854년생]은 한치원과 어떤 관계인지는 우포도청 심문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 측 기록에 나오는 한치원의 조카 ‘한 시몬’과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한완욱은 10세 때[1863년경]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숙부에게 대세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숙부는 ‘한치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 숙부 댁에서 오메트르 신부를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한완욱의 아내 김어린년[金於仁連] 체칠리아[21세, 1852년생]는 10세 때[1861년경]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천주교 기도문을 배워 대세를 받았습니다. 이후 윤평심 집에서 오메트르 신부를 만나 그때 혼배성사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한완욱과 김어린년 부부는 1863년 이후에 혼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아기[李阿只] 안나[23세, 1850년생]는 교회 측 기록에 나오는 ‘한치원의 제수’[동생의 아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포도청 심문 기록에 나오는 나이가 너무 젊기는 한데 한치원의 동생이 그와 재혼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아기는 14세 때[1863년경]에 시아버지에게 천주교 기도문을 배웠고 친부모에게 대세를 받았습니다. 오메트르 신부를 만났을 때 이웃에 사는 홍가의 집에서 남편과 혼배성사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여기서 홍가는 이어린년[한완쇠의 아내]에게 천주교를 가르친 홍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치명일기』 195번에 의하면, 한치원은 ‘홍주 사람’으로 나옵니다. 한치원이 홍주에서 직산 농촌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가족들에게 전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치명일기』와 『병인치명사적』에는 한치원 가족이 기사년(1869) 12월 28일[양력 1870년 1월 29일]에 함께 교수되어 순교했고, 그들의 시신은한치원의 동생 한 프란치스코가 수습했다고 나옵니다. 우포도청등록의 심문 일자인 임신년(1872) 11월 25일[양력 12월 25일]과는 2년 11개월 차이가 납니다. 또한, 우포도청등록에는 모두 배교한다는 진술 기록만 나올뿐 순교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십이단을 배우면서 입교한 신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천주교 복음을 전파했고,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박해시기’를 살다가 고난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79년 우포도청 심문에서 진술한 유만여 - 공식적인 마지막 ‘천주교박해’와 연관되다
기묘(己卯, 1879년) 6월 5일[양력 7월 23일] 우포도청에서 진술[『右捕廳謄錄』 29권, 8b~9b면]한 유만여(柳萬汝) 요셉[28세, 1852년생]은 서울 남문 밖 자암(紫岩) 태생으로 11세 때[1862년경] 이미 죽은 부친에게 천주경, 성모경, 십이단, 십계, 조만과, 신덕송을 배워 입교했습니다. 을축년(乙丑年, 1865)에 부친의 인솔로 남문 밖 최씨집에 가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1866년 베르뇌 주교의 사망[순교] 소식을 그의 부친에게 들었고, 그 부친이 죽은 후 생계 유지 방법이 없어서 아산에 사는 신자 장윤원(張允元)의 주선으로 아산 일북면(一北面) 산소리(山小里, 현재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이후 내포에 사는 사촌 유막현(柳莫賢)을 통해 1876년에 입국한 드게트 신부와 블랑 신부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직접 서양 선교사제들과 만난 적이 없는데 이미 공주에서 붙잡힌 사촌형수 김씨가 자신의 이름을 대서 체포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유만여의 사촌형수 김씨는 드게트 신부의 체포와 연관되어 공주에서 붙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드게트 신부는 1879년 3월 24일[양력 5월 14일] 공주 지방에서 신자들과 같이 체포되었고, 4월 9일[양력 5월 29일]에 포도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수개월 옥살이를 하다가 7월 21일[양력 9월 7일]에 석방되었고, 중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드게트 신부와 같이 체포되었거나 그 여파로 붙잡힌 신자들도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고 옥중 순교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만여가 순교했는지 여부는 포도청등록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유만여는 『치명일기』 353번과 『병인치명사적』 21권 111~112쪽, 22권 37~38쪽에 나오는 유 요셉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 요셉은 수리산[현재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1866년에 순교한 유 마오로[또는 바오로]이고, 그의 형은 배론 신학당 출신으로 1868년에 순교한 유 안드레아입니다. 1866년과 1868년 천주교 박해로 부친과 형이 순교하자, 동생들과 모친 전 마리아를 모시고 충청도 아산 산소말[산소리]에 살았습니다. 1879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이송되었고, 감옥에서 굶주려 죽었습니다.
1879년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의 포도청등록 기록를 통해 신자 부모들이 십이단 등을 자녀에게 가르침으로써 대대로 천주교 신앙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석원 프란치스코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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